추천사

프란치스코 출판사 북페어와 임창준 사진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은 인적이 끊긴 라 베르나(La Verna) 산중에서 깊은 신비 체험을 한 후 친필로 남겨 놓은 기도문에서 “하느님, 당신은 고요이시나이다”라고 찬미하며, 하느님의 절대 고요, 순수한 고요, 무극의 고요를 관상하고 유희한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도 시끄러워 마치 세상 자체가 소란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 시끄러운 것은 인간의 세계만 그러할 뿐, 우주는 참으로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보드 블럭의 틈새에서 짓밟히며 피어나는 풀들이나 산책로의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분주히 살아가는 벌레들은 생존에 여념이 없는 듯 보이나, 그들의 세계는 한적하기 이를데 없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지상의 만물을 휘감고 있는 고요는 무한히 깊다. 밤하늘의 별들에로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정적에 싸여 있는 우주가 태초부터 태극의 고요에 휘감겨 있고, 그 우주적인 고요가 우리를 송두리째 품고 있음을 이내 발견할 수 있다.

우주의 절대 고요는 악이나 거짓, 허위나 술수, 교활함이나 음흉함 같은 죄악의 어둠들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어 순수하게 고요하다. 절대의 세계에서 고요는 곧 순수이고, 순수는 곧 고요이다. 그런데 하느님 홀로 절대 고요이고 절대 순수이다. 따라서 고요도 순수도 신비가 된다.

고요와 순수가 하느님의 신비에로 흘러가며 유희한다. 벌 나비가 향기로운 꽃과 유희하고, 그믐달과 샛별이 적막한 밤을 유희하듯, 우주 만물이 하느님의 신비에로 흘러가며 고요와 순수의 신비를 역동적으로 유희한다. 

본성적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지향하는 고요와 순수의 살아 있는 신비적 유희!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한적한 라 베르나의 산중에서, 더할 나위없이 깊이 신비 속으로 빠져들었던 아씨시의 신비가 프란치스코 또한 황홀한 저유희를 관상하다 넋을 잃은 게 아니었을까 싶고, 그렇게 순수한 고요의 신비를 유희하다 오상을 받지 않았을까 헤아려 본다.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고요와 순수의 신비를 관상하며 유희해 온 이재성 보나벤투라 수사가 그동안 관상 카페에 모아 놓았던 영성시들을 임창준 프란치스코 작가의 사진 작품들 곁에 새롭게 다듬어 이를 『순수의 탑』으로 출판하였다. 

이 탑에 실린 영성시들과 사진 작품들이 독자들을 황홀한 신비의 유희에로 초대하는 듯 싶어, “무늬와 공간” 갤러리에 “프란치스코 출판사 북페어와 임창준 사진전”을 마련하였다. 신비의 관상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순수와 고요의 유희”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성의 향기에 취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작은형제회 고계영 파울로